지난 7월 2일 일본에서는 하츠네 미쿠 -Project Diva-라는 이름의 리듬액션 게임이 발매되었다. 인터넷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던 노래들이 다수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화제를 모았던 이 게임은, 발매 첫날 일본의 오프라인 매장에서 4만여개의 제품이 전량 판매되고 1주일만에 판매수 10만을 돌파했다.



또한 7월 3일에는 한국에서는 매뉴얼 한글화로 정식 발매되었고, 일판과 마찬가지로 발매 첫날 대부분의 오프라인 매장에서 찾을 수 없을 정도 많이 팔렸다고 한다. 용산 등 널리 알려진 오프라인 매장 중 일부에서는 '팔릴 것 같지 않아서'라는 이유로 게임을 들여 놓지 않다가 낭패를 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와 동시에 얼마 전에는 팡야 서비스에서 판매하는 코스튬 중에 하츠네 미쿠와 카가미네 린&렌의 복장이 추가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기도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부 블로그 등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던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初音ミク). PSP용 리듬액션 게임의 발매와 함께 대중 앞에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낸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는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 한국 팡야 서비스에서도 하츠네 미쿠가 등장한다 ]



보컬로이드 기술의 개발

미쿠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보컬로이드(VOCALOID)에 대해 알아보자. 보컬로이드란 보컬+안드로이드의 합성어로, 일본 YAMAHA에서 제작한 소프트웨어 엔진의 명칭이다. 좀 더 정확히 짚어보면 전문적인 작곡 도구 없이 집에서도 PC를 이용하여 간단하게 음악과 노래를 만들 수 있게 해 주는 음성합성 기술과 그에 관련된 응용제품을 일컫는 단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서 작곡은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노래를 부르게 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보컬로이드 프로그램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분량이 제법 많으니 간략하게 줄이면, 멜로디와 가사를 입력하면 프로그램 내에 저장된 음성 패턴 중에서 가사에 맞는 발음과 음정을 찾아서 출력하는 구조이다.



즉 도레미파솔라시도 중에서 '솔'의 음정으로 '가'라고 프로그램 내의 악보에 입력하면 음성 패턴 중에서 그것을 찾아서 실제로 출력하고, 이를 연속으로 출력되게 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 보컬로이드 엔진의 기본이다. 여기에 발음의 강약이나 떨림을 추가로 조정해 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보컬로이드 엔진의 기능인 발음을 각각 출력한다는 특징으로 인하여 '사람이 부르는 것과 같이 부드러운' 노래보다는 기계음에 가깝기 때문에,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호불호가 크게 갈리기도 한다.




[ YAMAHA의 보컬로이드 공식 홈페이지 ]



YAMAHA에서 제작한 보컬로이드 엔진을 이용하여 2004년 영어 음성 패턴을 기반으로 노래를 부르게 해 주는 LEON/LOLA/MIRIAM 시리즈가 먼저 유럽에 발매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상용화된 프로그램의 일본 내 판매를 맡았던 크립톤 퓨쳐 미디어(CRYPTON FUTURE MEDIA, 이하 크립톤)는 영어 음성 패턴 대신 일본어 음성 패턴을 집어 넣은 상품을 개발하였다.



2004년 11월 크립톤을 통하여 보컬로이드 엔진을 이용한 첫 번째 상품인 MEIKO가 발매된다. 일본 가수 하이고우 메이코(拝郷メイコ)의 음성 패턴을 이용한 MEIKO는 이후 발매되는 크립톤의 보컬로이드 시리즈들의 큰언니로서, 가수의 이름만을 차용한 가상의 캐릭터를 내세워서 판매된 것이다. 또한 MEIKO에 이어서 마찬가지로 남자 가수의 음성 패턴을 바탕으로 KAITO도 제작되었다.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

보컬로이드 기술은 다시 한 번 YAMAHA에서 개량되어 새롭게 보컬로이드2 엔진이 제작되고, 이를 이용하여 스웨덴에서 SWEET ANN이 발매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크립톤은 보컬로이드2 엔진을 이용하여 MEIKO&KAITO에 이은 새로운 시리즈로 2007년 8월 31일 1탄 하츠네 미쿠를 내놓았다.



일본의 여자 성우 후지타 사키(藤田咲)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16세 소녀라는 설정으로 만들어진 하츠네 미쿠는 이후 15세의 남매라는 설정의 카가미네 린&렌(鏡音リン・レン)과 20세 여성의 메구리네 루카(巡音ルカ)로 이어지는 보컬로이드2 엔진을 이용한 캐릭터 보컬 시리즈 3종의 시초가 되었다.




[ 캐릭터 보컬 시리즈 3종, 하츠네 미쿠(좌) / 카가미네 린&렌(중) / 메구리네 루카(우) ]



물론 캐릭터 보컬 시리즈 외에도 보컬로이드2 엔진을 이용하여 다수의 소프트웨어가 발매되었으나, 현재 보컬로이드2 엔진을 대표하는 것은 크립톤의 캐릭터 보컬 시리즈 3종이다.



UCC로 인기를 얻은 하츠네 미쿠

소프트웨어 패키지에 그려져 있던 한 장의 캐릭터 이미지로 시작된 미쿠는, 발매 5일 후 일본의 동영상 사이트인 니코니코 동화에 Otomania라는 아마추어 작곡가의 손에 의해 제작된 Ievan Polkka라는 하나의 곡이 올라오면서 수직적인 인기 곡선을 그리게 된다.(7월 19일 현재 동영상 재생수 240만 회, 코멘트 12.7만 개)



[ 미쿠의 사실상 데뷔곡인 Ievan Polkka 영상 ]



SD로 그려진 미쿠가 음악에 맞춰서 파를 휘두르는 단순한 영상과 중독성 있는 가사로 인기를 모으며, SD 미쿠를 하츄네 미쿠라고 부르게 되었고 미쿠에게는 파가 반드시 따라붙게 되었다.



이후 수 많은 아마추어 작곡가들과 동인 문화를 통해 제작된 하츠네 미쿠가 부르는 노래들이 니코니코 동화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소개되었으며, 이를 변형한 2차 창작물과 아마추어라는 특성을 살린 무한 배포 등으로 순식간에 그 팬층을 늘려나갔다.



심지어 Melt(メルト, 7월 19일 현재 동영상 재생수 465만 회, 코멘트 57만 개)라는 곡은 일본 오리콘 차트 상위권에 올라갈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그와 함께 1세대 보컬로이드인 MEIKO&KAITO가 재조명되는 기회를 만들었다. 대형 프로덕션과 같이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서 노래를 만들고도 불러 줄 사람이 없던 아마추어 작곡가들에게는 미쿠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2차 창작의 활성화 및 문화 코드로 자리잡다

생각지 못한 미쿠의 인기 폭풍에 놀란 크립톤은 미쿠를 이용한 2차 창작물에 관련된 저작권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함과 동시에 공식 팬사이트 피아프로(ピアプロ)를 개설하기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각종 일러스트 및 악곡을 올리고 비영리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니코니코 동화와 피아프로는 미쿠를 위한 공간이 되었다.




[ 피아프로에 투고된 미쿠 관련 일러스트, 등록된 일러스트 5만여개, 음악은 1.3만곡 이상 ]



발매 후 초반에는 이렇다 할 노래가 없었지만 점차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작곡가들이 참가하면서 일부 곡들은 소니 뮤직 등 메이저 음반 업체를 통하여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그뿐 아니라 코믹스 작가 그룹인 CLAMP와 애니메이션 제작팀 GONZO역시 미쿠 관련 컨텐츠 제작에 일부 참여를 할 정도로 하나의 사회적 문화 코드로 자리잡는다.



또한 노래 뿐 아니라 각종 게임 및 애니메이션에도 미쿠는 카메오 출연을 하는 등 다방면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각종 피규어 제작 업체에서도 다수의 미쿠 피규어를 발매하였으며, 대부분 발매된 지 며칠만에 모조리 연기처럼 매장에서 사라져서 '녹색 악마'로 불리기도 했다.




[ PSP판 미쿠 공식 홈페이지의 각종 협력사 배너, 이 외에도 많다 ]



하츠네 미쿠의 캐릭터의 위력을 알아차린 일본 세가(SEGA)는 크립톤과 손을 잡고 그 외에도 다수의 캐릭터 관련 회사들이 참여하여, 미쿠를 중심으로 하는 프로젝트 디바(PROJECT DIVA) 그룹을 편성하여 본격적인 상업 활동을 시작한다.



리듬게임으로서의 하츠네 미쿠

7월 2일(한국은 7월 3일) 발매된 PSP용 하츠네 미쿠는 ○X□△ 4개의 버튼만으로 화면에 나타나는 노트들을 맞추는 비교적 간단한 리듬액션 게임이다. 그렇지만 리듬에 따라 노트가 내려오는 비트매니아나 DJMAX 계열의 리듬액션 게임과는 달리, 리듬보다는 미쿠의 노래에 노트가 맞춰진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 PSP판 하츠네 미쿠 플레이 화면 ]



그래서 기존 리듬액션 게임에 적응된 사람들은 노트가 맞지 않는다던가 판정이 이상하다는 평가를 내렸으나, 미쿠로 처음 리듬게임을 접한 사람들은 오히려 노래를 좋아하게 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즉 게임 화면에 등장하는 노트는 미쿠의 노래 발음 그 자체로, 노래를 외우면 외울수록 게임 플레이가 쉬워져서 게임을 즐기는 누구라도 미쿠의 팬으로 끌어들이는 중독성을 갖는다.



게임 내에서 일정 조건을 달성하면 노트 없이 뮤직비디오급의 영상만 볼 수 있는 PV모드를 제공하여, 리듬게임이기 이전에 캐릭터 게임이라는 느낌을 준다. 또한 미쿠가 갈아입을 수 있는 다양한 복장 외에도 다른 보컬로이드의 외관까지 이용할 수 있고, 심지어 미쿠의 2차 창작 캐릭터인 요와네 하쿠(弱音ハク)와 아키타 네루(亞北ネル)까지 포함되어 있다.



또한 게임에 수록된 곡들은 대부분 니코니코 동화를 통하여 인기를 얻은 곡들 중에서 선정되었으며, 일부 곡들은 프로 작곡가의 손에 새롭게 제작되어 호평을 받고 있다. 미쿠의 율동 영상은 실제 청소년 배우를 기용하여 버추어 파이터 이후 축적된 세가의 모션 캡처 기술로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고, 일부 곡과 로딩 화면에 사용된 이미지와 미쿠의 복장은 대부분 피아프로에 투고된 복장과 이미지를 채택하였다.




[ PSP판에 사용된 200여개의 이미지들은 대부분 유저 투고에서 채택되었다 ]



세가는 미쿠의 컨텐츠를 PSP용 리듬게임으로 만들기 위한 기술과 제작만을 담당하였고, 그 내부 컨텐츠의 대부분은 미쿠를 바탕으로 하는 2차 창작물로 채워져 있어서 사실상 하츠네 미쿠의 팬의 손에 의해 제작된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PSP 처리속도의 기술적 문제로 인해 3D로 그려진 플레이 율동 영상 중 일부는 PSP에 따라서 프레임이 저하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PSP판 하츠네 미쿠의 가장 큰 특징은 수록곡이 아닌, 2차 창작을 유도하는 에디트 모드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mp3 파일을 불러와서 실제 게임과 같이 캐릭터를 춤추게 하고 화면에 리듬 노트를 날아다니게 할 수 있는, 누구나 미쿠 리듬게임과 뮤직 비디오를 제작할 수 있는 기능을 PSP용 게임 내에서 제공한다.




[ PSP판 발매 전 공개된 보컬로이드들이 등장하는 프로모션 무비 ]



이것은 수록곡을 충분히 즐긴 사람들을 또 다시 에디트 기능을 통해 무한히 게임을 만들어 내고, 게임 내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복장을 이용해 기존에는 쉽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2차 창작을 유도하게 된다. 실제로 게임 발매 이후 곧 각종 매체를 통해 에디트 모드를 이용하여 다양한 곡들과 새롭게 제작된 율동 영상이 소개되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강력한 문화 폭탄이 만들어지다

언더그라운드 동인계에서 높은 지지를 얻으며 PSP 발매와 함께 대중화라는 메인 무대에 등장한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 미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부 동인계 또는 블로그 등에서만 다뤄지던 '일본 캐릭터'에 불과했으나, 일본의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대형 회사들의 조직적인 협력으로 하나의 문화 코드로 완성되었다.



크립톤은 PSP판 발매에 맞춰 발매 직전 파이프로를 통하여 미쿠 캐릭터의 저작권을 비영리적인 경우 누구나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피아프로 캐릭터 라이센스를 정식으로 발표하여 2차 창작의 기반을 굳힌다. 그와 함께 미쿠의 성공은 해외 UCC 사이트인 유튜브 등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알려지며, 영어 음성의 보컬로이드 엔진을 이용한 새로운 버추얼 아이돌이 제작되고 있다.



이제 하츠네 미쿠는 속칭 속칭 '덕후'라고 불리는 동인과 소수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하나의 대형 폭탄과 같은 문화 코드로 자리잡게 된 것이고, 앞으로도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버추얼 아이돌이 생명을 얻기 위한 사회

하츠네 미쿠의 성공을 주도한 프로젝트 디바는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그룹을 만들어서 각자의 분야에서 노하우를 총동원하여, 하나의 일러스트 캐릭터를 만인의 버추얼 아이돌로 키워내는 데 성공한다.



로맨스나 각종 소문 등 대부분의 연예계에서 심심하면 벌어지는 사건과는 인연이 없고, 작곡자의 노래를 충실히 불러 주는 가상 세계의 아이돌 하츠네 미쿠는 이제 보컬로이드 프로그램 구입자의 단독 소유물이 아니다. 네트워크에 연결된 네티즌의 손에 의해 성장하고 공유되는, 자신만의 아이돌이자 모두의 아이돌로 성장한 것이다.



또한 앞으로 비영리적 무상 활용 라이센스에 따라 무한히 미쿠의 2차 창작물은 만들어지고, 이를 통해 새로운 예술가들이 이름을 알리는 기회가 늘어날 것이다. 그뿐 아니라 프로젝트 디바를 주도하는 메이저 제작사들은 뛰어난 소질을 가진 아마추어 작곡가 및 그래픽 디자이너들을 다른 경쟁업체에 비해 우선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하나의 일러스트가 문화 코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2차 창작물을 생산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환경과, 이를 상업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능력 및 가능성을 캐치할 수 있는 기업 등 수 많은 전제 조건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한 명의 뛰어난 제작자의 머리 속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대규모 자본의 투자로 상품화가 진행된 기존의 컨텐츠는 결국 생명력의 한계를 맞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에 존재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무한히 생산되고 성장해 가는 하츠네 미쿠의 성공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이례적인 사건이면서도 새로운 문화 컨텐츠의 패러다임을 제공한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 같으면서도 다른 시몬과 미쿠 ]



기자는 처음 하츠네 미쿠의 성공을 보면서 2002년 상영된 알 파치노 주연의 시몬(S1m0ne)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프로그램상으로만 존재하는 가상의 연예인 시몬이 버추얼 아이돌로서 생명을 얻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영화 속의 장면이 하츠네 미쿠와 겹쳐 보였던 것이다.



하츠네 미쿠는 시몬과 같이 인터넷을 통해 홍보되고 생명을 얻는 것은 동일하지만, 소수의 제작자에 의해 만들어진 시몬은 영화 속에서 제작자가 프로그램의 스위치를 내리면서 생명이 끊기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러나 미쿠의 경우 보컬로이드 프로그램을 구입한 작곡가나 그림을 그리는 팬이 남아 있기만 한다면 언제까지나 하츠네 미쿠를 비롯한 보컬로이드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다수의 유저가 공유하고 제작하는 컨텐츠의 지속성과 확장성을 보여준다.



최근 발표된 새로운 저작권법으로 인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지금의 한국 상황에 비추어 보면, 2차 창작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이를 모두가 공감하는 하나의 사회적 상업적 문화 컨텐츠로 육성하는 일본의 인터넷&엔터테인먼트 환경이 새삼 부러운 것은 기자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