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부터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모니터에 집중하다 담뱃재를 또 키보드에 떨어뜨린다. 화장실 갈 타이밍 잡는 것도 골치다. 상황이 이쯤 되니 목과 어깨로 걸쳐 받던 여자친구 전화도 집중이 안 된다. 미안한 마음은 일단 접어두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금 전장 속으로 뛰어들게 되는데...


게임 하나에 이토록 몰입한지가 과연 얼마만인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최근 작성한 게임 리뷰 중에서 가장 플레이 시간이 긴 듯 하다. 또, 한가지 덧붙이자면 리뷰를 작성한 후에도 아마 한동안은 파묻혀서 지낼 듯 하다. 사실, 심각하게 중독되었다.


희한한 것은 평소에 선호하던 장르도 아니라는 사실. 방대한 스펙을 가진 RPG도 아니고, 원맨쇼의 진수를 보여주는 싱글 FPS도 아니다. 오로지, 멀티플레이만을 지원하는 밸브(Valve)의 신작 FPS '팀 포트리스2'(Team Fortress2)다.



[ ▲ 시작 로딩화면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




밸브가 9년여의 개발기간 동안 하프라이프2와 같은 심오한 스토리 텔링을 배제한 멀티플레이 중심의 팀 포트리스2를 완성하면서, 그래픽과 게임플레이 등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완전히 뒤집어 엎은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밝힐 정도로 야심차게 준비한 모양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멀티플레이 특화 FPS '팀 포트리스2'에 강력한 생명력을 불어넣고, 게임플레이에서의 본질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해부하는 과정 자체가 실제 플레이만큼이나 매우 흥미롭다는 점이다.



[ ▲ 9개 클래스가 팀 포트리스2의 핵심 ]





맵, 밸런스, 그래픽 등 머리 속에 떠올릴 수 있는 다양한 재료들이 있겠지만 팀 포트리스2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9개의 클래스"임에 틀임이 없다. 9개로 특화된 개성 있는 각 직업들 자체가 팀 포트리스2가 원초적인 '재미'를 생산하게끔 만드는 원동력임과 동시에 멀티플레이서의 보다 큰 가능성을 열어주는 주인공인 셈이니까.


그렇다면, 먼저 주인공 소개부터 해야 예의일 듯 하다. 크게 9개의 직업은 '공격, 방어, 지원'이라는 세가지 범주로 나뉜다. 공격 파트에는 솔져, 스카우트, 파이로가 포진해 있고, 방어 파트에는 데모맨, 중기병, 엔지니어가, 지원 파트에는 메딕, 스나이퍼, 스파이가 있다.


각 직업들은 저마다 독특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다른 누가 그 역할을 쉽사리 대체할 수도 없으며, 대부분이 접해본 MMORPG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볼 수 있는 직업 간 조합과 상성 개념 또한 탄탄하게 잡혀 있다. 한번 예를 들어 보자.


메딕은 일반적인 힐러의 개념인데 메딕과 엄청난 체력과 공격력을 가진, 하지만 이동 속도는 느린 중기병과의 조합은 적의 방어선을 뚫고 한번에 쓸어버리는데 있어 더 나위 할 것 없이 좋다. 특히나, 힐 게이지가 가득 찼을 때 메딕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사용 가능한 '불사신 모드'는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피해를 입지 않게 되어 적절한 타이밍만 뒷받침 해준다면 무적이나 마찬가지다.



[ ▲ 이런게 바로 메딕과 중기병의 불사신 모드, 죽지 않아! ]




하지만, 여기서 시야에서 멀리 위치한 적 진영의 스나이퍼가 메딕을 헤드샷으로 날려버리거나, 스파이가 아군으로 위장하고, 클로킹 (은신)으로 숨어들어와 단검으로 백스탭을 통해 한방에 메딕을 사살해 버린다면 위의 조합은 바로 무용지물이다.



[ ▲ 팀 포트리스의 꽃, 스파이의 변장과 백스탭 ]




스카우트는 이단 점프도 능하고, 이동 속도가 매우 빠르면서 한 번에 많은 탄환이 발사되는 총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컨트롤에 따라서 적 진영 전체를 신속하게 뒤흔들 수 있고, 장거리 공격에 능하고 다양한 움직임으로 전투에 최적화된 솔져를 바보로 만들기도 하지만, 활동 영역이 제한되는 좁은 공간에서는 데모맨의 예측 불가능한 수류탄 발사 공격에 재물이 되기 십상이다.



[ ▲ 전투에 최적화되어 가장 인기가 많은 '솔져' ]




그렇다면 엔지니어는? 부단히 움직이며, 적 진영의 이동이 잦은 장소에 센트리건(설치형 자동 무기, 엔지니어의 노력에 따라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을 교묘하게 장착해놓고 어지간해서는 뚫리지 않는 자신만의 진지를 구축해 놓았다고 치자. 당분간은 덫에 걸려 비명을 지르는 적 진영 플레이어들을 바라보며 능숙한 사냥꾼의 미소를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파이가 몰래 들어와 설치형 무기와 장비들을 공병으로 콱 부셔놓고 잔인하게 백스탭을 하거나, 저 멀리서 솔져의 연사 로켓탄으로 인해 한번에 아작 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만 말이다.



[ ▲ 이처럼 만반의 준비를 해놓아도 장담할 수는 없다. ]




직업 구성에 대한 이런 저런 고민을 거듭한 끝에 막강한 화력과 방어력을 동시에 자랑하는 부대가 탄생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대 진영 파이로가 뒷구멍(?)으로 돌아 들어와 화염방사기로 부대 전체를 한번에 태워버린다면 순식간에 그 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어흑!



[ ▲ 파이로, 목표: 다 태워버리겠다! ]





처럼, 천차만별 개구쟁이 직업들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것 자체로도 실제 플레이 하는 게이머의 흥분 게이지를 상승시키며, 다른 팀원들과의 손발이 잘 맞아 상대 진영을 완전히 묵사발로 만들었다면 그 쾌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플레이 해나갈 수록 차츰 차츰 '솔로부대'가 아닌 '팀 포트리스2 열혈 부대원'으로 재탄생 되는 자기 자신도 만날 수 있다.


그 동안 인터뷰 혹은 미팅을 통해 전해 들었던 FPS 개발자들의 꿈, 즉 FPS 고수가 아니더라도 '총질은 쥐약이지만 다른 방면에는 꽤 소질이 있는 게이머'가 전장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한다는 이상향이 팀 포트리스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의미다.



[ ▲ 총질에 자신이 없어 메딕을 했더라도 센스만 있다면 상위랭커가 가능하다 ]




그러나, 팀 포트리스2가 이러한 직업 특화적인 요소만으로 이 치열한 FPS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것은 아니다. 카툰 렌더링으로 제작된 코믹한 그래픽은 살벌한 FPS 게임들을 거쳐온 게이머들을 누나(?)의 따뜻한 포옹으로 감싸 안는 듯 하며, 이에 더해진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는 게임플레이 외적인 요소들을 일부러 학습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준다.


캐릭터의 생김새, 맵의 구조, 게임플레이에 필요한 아이템 등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배려되어 처음 접하더라도 몇 게임만 해보면 마치 오랫동안 살아왔던 내 방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 아이콘, 화살표 등의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는 따로 배울 필요가 없게 한다. ]




이뿐 아니라 더 공부(?)하고 싶은 게이머를 위해 '왜 데모맨 외에는 아예 수류탄을 사용할 수 없도록 했는지', '왜 배경 경계선 처리와 맵 디자인, 캐릭터 생김새에 카툰렌더링 기법을 도입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밸브 개발자들의 9년 간의 고민과 설명 등을 유쾌한 애니매이션으로 제작된 개발자 코멘트리 컨텐츠를 통해 게임 내에서 제공하고 있으니 이 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 ▲ 마음이 따뜻해지는 개발자 코멘트리까지~ ]





만에 정말 재미난 게임을 만나니 할말이 많아진다.


팀 포트리스2의 세세한 게임플레이와 맵 디자인에 대해서도 A4지 몇 장에 걸쳐 설명하고 싶었지만, '스포일러를 극도로 싫어하는 최근 추세에 맞춰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참기로 한다. 사실, 하프라이프 시리즈와 카운터 스크라이크의 밸브인만큼 전체적인 완성도를 비롯해서 사운드, 밸런스, 등등 그 외 소소한 부분에서도 태클 걸만 한 것이 거의 없더라.


그 동안 FPS를 즐겨왔던 게이머라면, 최근 우후죽순 식으로 등장한 구분이 잘 안가는 FPS에 실망했던 게이머라면 한번 팀 포트리스2를 무조건 접해보라. 일단 무한 감동받을 준비부터 단단히하고.



[ ▲ 두 명의 힐러에게 동시 힐링받고 있는 든든한 중기병 형님 ]




혹시 밸브 홍보직원 아니냐고? 누구의 표현을 애써 빌리자면 기자와 밸브의 관계는 가끔씩 배고플 때 라면 끊이려고 한번씩 열고 닫는 관계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꼭 하나 마음에 걸리게 있다면 또 한 명의 순진한 게이머를 중독성 강한 팀 포트리스2의 세계에 발붙이게 한 죄 밖에 없을 것이다.


FPS 게임에 자신이 없는 '발컨'인 나는 어떻하냐고? 무조건 팀 포트리스2를 질러서 일단 플레이 해보라. 짧지 않은 이 찬양글을 작성한 기자도 역시나 그랬고,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까.







Inven Vito - 오의덕 기자
(vito@inven.co.kr)